요즘 나는 ‘피해자’라는 말이 자꾸 목에 걸린다.

2026.6.4 한생명복지재단 대표 이효천

요즘 나는 ‘피해자’라는 말이 자꾸 목에 걸린다.

삼키지도, 뱉어내지도 못한 채 그 단어 앞에서

나는 자주 화가 나 있다.

너무 쉽게 사람을 삼켜버리는 그 말은

그 사람이 겪은 일을 말하는 척하면서,

그 사람을 다시 그 일 안으로 밀어 넣는다.

겨우 빠져나오려는 사람을 자꾸 같은 자리에 세워두고,

다시 말해보라고 하는 것만 같다.

어디가 아팠는지.

얼마나 아팠는지.

왜 그때는 아무 말도 못 했는지.

왜 그때 도망치지 못했는지.

질문들은 금방 생겨나고 말들은 쉽게 모인다.

나는 그 말들 때문에 꽤 오래 화가 나 있었나 보다.

그 화는 자꾸 나를 앞으로 몰아낸다.

대신 화를 내고, 대신 말하고,

무언가를 막아야 할 것 같았고,

누군가에게는 되물어야 할 것 같았고,

끝까지 물러서지 말아야 할 것 같았다.

나는 그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.

그러다 나는 또, 그 사람들 곁의 빈자리를 본다.

홀로 싸웠을 그 시간 동안 곁에 누군가는 있었는지.

긴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혼자는 아니었는지.

말하지 않아도 괜찮고,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.

무너져도 버려지지 않는, 그런 것이 그 사람 곁에 있었는지.

있었어야 했지만 어쩌면 끝내 비어 있었을지도 모르는 자리.

그 빈자리는 ‘피해자’라는 말만큼이나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.

말은 입 밖으로 나와 사람들 사이를 지나 사라지지만,

비어버린 자리는 한 사람 안에 남아 마르지 않는 자국이 된다.

나는 요즘 그 자국들을 보며 자주 한숨을 쉰다.

세상이 잘 이해되지 않는 날들이 있다.

어떤 사건들은 제발 설명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데,

사건들은 그런 나의 앞에 멈춰 서 비웃듯 나를 바라본다.

그럴 때마다 이 세상과 나는

꽤 많이 어긋나 있다는 생각이 든다.

같은 것을 보고도 같은 방식으로 아파하지는 않는구나.

그런 날들이 쌓이고 그런 사람들만 만나다 보니까,

나는 저녁 늦게 불 꺼진 예배당에 자주 혼자 앉아 있다

그리고는 그 사람들의 겪었을 밤을 떠올려 보곤한다.

문을 닫고 울었을 시간.

휴대폰 화면만 멍하니 바라봤을 그 시간.

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가 끝내

아무 버튼도 누르지 못했을 밤.

그 시간들 앞에서 나는

무슨 기도를 해야 할지 몰라,

한참 동안 나의 빈 손만 내려다보다

그냥 아무말이나 읊조리곤 한다.

아픔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

어쩌면 아픔 그 자체가 아니라,

그 아픔 앞에서 혼자였다는 감각일지도 모른다.

누군가가 그 일을 겪었다는 사실보다

그 일을 겪는 동안 아무도 곁에 없었다는 사실이

더 늦게, 더 깊게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인지도 모른다.

그래서 나는 이제 무엇을 대신 말해야 하는지보다

어디에 함께 서 있어야 하는지를 더 자주 생각해본다.

무언가를 밝혀내는 사람보다 무언가가 무너질 때 도망가지 않는 사람.

질문을 앞세우기보다 먼저 물 한 잔을 건네는 사람.

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은

아주 조금은 덜 혼자가 되지 않을까.

나는 너무 늦게 안것같다.

누군가를 지킨다는 건 그 사람을 대신해 싸우는 일보다,

그 사람이 혼자가 되지 않도록

곁에 오래 남아 있는 일에 더 가깝다는 것을.

피해자라는 말이 그 사람을 자꾸 삼켜 과거로 끌고 간다면,

내가 해야 할 일은 그 사람을 다시 현재의 자리로 불러오는 일.

당신은 아직 여기 있다고. 당신은 그 일보다 크다고.

당신은 설명하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라고.

나는 요즘 보호자라는 말을 그렇게 배운다.